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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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다 끝내기도 전에 리뷰를 뭐라고 쓸까 고민하는 적은 드물었다. 책이 다 끝나면 전체적으로 드는 느낌과 함께 막연했던 생각들이 자연적으로 정리가 되며 매듭이 지어진다. 그리고 나면, 그때부터 써 내려 가는 일이 내가 하는 리뷰의 방식이다.

가능하면 책을 읽고 나서 든 날 것으로의 느낌을 포착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여 뭘 쓸까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지나친 사유로 인해 처음 가졌던 생각이 밀리지 않도록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책과 함께 달궈졌던 마음 상태 그대로, 나의 머리와 가슴을 지배했던 것들의 순간과 가장 밀착해서 다가가고자 한다. 그런 방식이 책과 맺는 나만의 관계이고, 각각의 리뷰는 책과의 추억 앨범 속에 모이게 된다. 좀 비뚤어진 생각이라도, 남들에게 창피하게 보일 유치한 생각이라도, 도전적이고 급진적인 생각이라도 모두 앨범에 담는다. 예쁜 사진첩이 아닌 가장 솔직하고 사실적인 나만의 앨범을 만들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은 1권을 끝내기도 전에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이 먼저 되었다. 초조한 마음이 책 읽는 동안 페이지 사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책은 새로운 방식의 리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아주 큰 밑그림만 잡히고 세세한 것은 잡히지 않고 있다. 더 기다리면 변질할까 두려워 잡힌 밑그림을 붙잡고 시작해 보지만, 바다 바깥세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바닷속 세계의 광활함에 길을 잃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다. 마치 방대한 양의 성경을 어렵사리 완독했지만, 이 책을 이제는 덮어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성경에 대해 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처럼.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성경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을 읽으며 갖는 감상으로는 매우 생소했는데 분명 그랬다. 성경처럼 여겨졌던 이유로는 인간 군상의 나올 수 있는 모든 비극과 희극의 삶이 소설 속에 전부 녹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있다. 기쁨도 슬픔도 성공도 실패도,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특히 한 가문이 백 년간 지속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인간 세상의 일들이 만화경처럼 소설 속에서 펼쳐졌다. 꼭 콜롬비아 마꼰도라는 도시의 무대가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인간들의 매우 전형적인 이야기들이 기적과 마술과 함께 적절히 버무려져 있다. 성경이 성스럽고 고귀하다고 해서 인간의 아름다운 이야기만 담은 것이 아니듯, 추하고 더럽고 숨기고 싶은 이야기마저도 진솔하게 담겨 있어 진정한 사람 사는 이야기에 믿음이 더 가듯이 말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소설이 성경에서처럼 실제로 기적 같은 일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기적이 삶 일부분인 세상에서 콜롬비아 사람들은 기적을 바라고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신기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읽으면서 소설이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는데, 아무리 소설이 허구라 해도 기적 같은 일을 사실인 양 작가가 작정하고 기술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성경책을 읽고 있는 느낌을 준 소설은 여태껏 없었다. (물론 성경을 소설처럼 읽는 경우는 많겠지만) 소설은 인간의 창작이고 성경은 성령의 감화로 쓰인 글이라서 도저히 이 두 가지를 같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인간과 신을 하나로 취급하듯 매우 부자연스러운 일인데 말이다. 그렇게 존재하기 힘든 두 가지가 함께 부유하는 느낌을 이 소설을 읽으며 받았었다. 그런데, 우연이지만 전혀 다른 이유 즉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관문이라는 차원에서, 이 작품이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성경’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마치 내가 누군가의 비평을 표절한 것 같지만 장담하건데, 그건 기적 같은 우연일 뿐이다.

바로 그 기적, 마술 같은 신비로움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문학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평론가들은 언급한다. 내게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이렇다. 아라비안나이트의 요술 램프처럼 기괴하고 신기하며 다분히 요술 적이고 주술적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현실적이지 않은 듯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런 마술 같은 이야기가 무엇보다도 콜롬비아의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과 잘 어우러지고 있다. 마술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데 마술과 함께 백 년간 계속해서 부엔디아 가문이 이어져 간다. 4년이 넘도록 계속해서 비가 내리질 않나, 죽은 자가 산 자의 삶에 얼씬거리질 않나, 하늘로 산 채로 승천하는 사람이 생기질 않나, 밥이 아닌 흙을 먹는 자가 있질 않나, 양탄자가 둥둥 떠다니고, 돼지 꼬리를 단 인간이 태어난다. 작가 마르케스가 가진 상상력을 총동원해 보여주는 마술 종합 예술 공연처럼 독자를 매혹시키면서.

생각해 보면 불과 백 년 전 콜롬비아 사람들 이야기인데, 이렇게 원시적이고 주술적이며 비논리적이고 신비로운 세계에 둘러싸여서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마치 아메리카 토착민들과 잉카 문명의 시원에서 그다지 멀리 달려오지 않은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아가는 느낌을 준다. 기원전 몇 세기의 작가도 아닌 현대 20세기 작가가 어떻게 그런 느낌이 드는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놀랍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소설을 쓴 게 아니라 신의 영감을 받고 성서를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묘하게 스쳐 간다.

이 책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익숙해 지고 나면, 독자는 책을 읽으며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가르지 않게 된다. 마술적인 부분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삶에 융합되고 하나가 된다. 그냥 그런 삶이 믿어지는 것이다. 마치 성경의 이야기들을 믿음의 눈으로 읽으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의 과학적 증거를 따지는 것이 되려 무모해 지고, 신비하게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듯이 말이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결말을 향하고 있다면, <백년의 고독>에도 작가가 의도한 결말이 있는 것 같다. 안타깝지만 백 년간 이어진 부엔디아 가문의 수 대에 걸친 이야기들이 마냥 그렇게 하염없이 흘러가도록 작가는 놔두고 싶지 않았나 보다. 작가는 이 가문이 끌어온 100년간의 고독과 담판을 짓는다. 성경이 인류의 종말을 계시해 주듯, 소설의 결말은 부엔디아 가문에 예언처럼 계시되었던 고독이 이제 그 순환을 멈추고 가문에서 영원히 끝을 맞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수 대에 걸친 고독한 인간들의 삶의 순환이 계속해서 이어질 듯하다가 양피지에 계시대로 가문의 종말이 찾아 왔다.

가문의 종말을 통해 작가가 의도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비극으로 끝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에서 인간 본연이 가진 고독한 삶의 결말과 연결 지어 본다. 작가는 가문에 내려온 저주와 같은 고독을 과감히 끊어 내어 버리는데, 부엔디아 가문의 종말이 그동안 감내해 온 길고 긴 고독으로부터 마침내 자유롭게 하고자 의도한 것은 아닐까 싶다. 한 개개인의 죽음도 고독했던 삶의 완성을 이루듯, 대를 이어 지속하는 고독한 인류의 순환에 작가는 결국 종말을 선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 인류의 고독을 소설을 통해 제시해 주고 싶었던 것일까?

내가 이 소설을 종말론적인 시점에서 이해해 보려고 시도한 것은 단순히 이 책을 성경처럼 읽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사실적이되 기적 같고, 살다가 죽는 것도 마술처럼 신비하지만, 매우 실제적인 우리의 삶이듯, 결국 마르케스가 소설 속에서 보여준 ‘마술적 리얼리즘’이 성경의 메시지와 무엇보다도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